목사의 소명과 자질

2011.06.30 10:14

정선근 조회 수:2870

인터넷에서 보고 공감이 가기에 올려 봅니다.

소명(召命)은 '신하를 부르는 왕의 명령', 또는 기독교 용어로서 "사람이 어떤 특수한 신분으로 신에 봉사하도록 신의 부름을 받음"으로, 자질(資質)은 '타고난 성품이나 소질, 또는 어떤 분야의 일에 대한 능력이나 실력의 정도'라고 민중국어사전은 말한다. 이 단어의 정의를 목사에게 적용시켜 본다. 목사는 하나님이 목사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이를 위해 타고난 성품이나 소질도 있어야 하고, 아니면 목회를 위한 능력이나 실력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목사의 길에 들어서려는 모든 사람과 그런 사람을 뽑아 목사로 훈련시키고 만들어내는 신학교는 소명과 자질에 대한 철저한 점검과 구비(具備)에 힘씀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 원칙과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현실이 우리의 가슴에 깊은 아픔과 주님의 몸 되신 교회에 큰 상처를 주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봉쇄하고 있다.

이 모순과 괴리 때문에 오늘 이 땅의 기독교와 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한국 교회의 고속성장이 시작된 1970년대부터 이런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교회 성장은 바른 복음과 좋은 목사, 헌신된 성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성장에 무언가 병폐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즉 성장을 위해 변질된 복음을 담보로 제공했다. 그 결과 성경적이며 온전한 수준의 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시키는 데 실패했다. 삶을 통해 실천되는 복음이 없는 이원론적인 그리스도인을 양산했다. 그뿐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의 소명 및 자질의 철저한 점검과 충실한 훈련 없이 목사를 마치 공장의 제품처럼 대량으로 배출했다.

오늘의 현실은 솔직히 100%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실패와 불순종이 주님의 눈에서 피 눈물을 흘리게 하는 또 하나의 현실에 대해 이미 목사가 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세상에서 들려오는 우리의 치부와 환부에 대해 나름대로 변명하려거나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또는 무시하거나 너무 많은 조롱과 멸시에 면역이 되어 이젠 수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 물론 그 비판을 다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악한 영적 세력이 배후에서 준동하는 것도 일정 부분 있다. 게다가 개혁과 갱신을 빙자한 기독교 일부 단체 및 매체들의 무분별한 재판관 노릇과 폭로성 한탕주의는 문제 해결과 자정(自淨) 작용에 큰 방해가 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문제의 증폭과 분노의 확산 및 복음과 교회에 대한 환멸을 견고히 하는 안티 기독교 세력에게 요긴히 사용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현재 한국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이 복음과 삶에 있어서 너무 많이 일탈(逸脫)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와 내용에 관계없이 이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구차한 변명이나 무시, 사단의 역사 등으로 현실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폭넓게 보면 교회 외부에서 교회와 목사, 그리스도인을 향해 쏟아내는 비난과 조롱, 멸시 속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1907년의 대부흥에 대한 환상의 연장선에서 2007년의 이벤트성 행사에 매달릴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우리의 영적 현실 때문에 그때와 마찬가지로 애통과 회개의 눈물, 분명한 결단과 삶의 변화를 간구해야 한다. 우선 가능한 현실적인 개혁부터 말한다면 신학교는 더 이상 실패자의 도피지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교가 너무 많다. 목사가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요도, 뜻도 아니다. 목사 후보생의 소명에 대한 철저하고 제도적인 점검, 신학교의 혁명적인 변화(교과과정, 훈련방식, 교수와 학생 관계, 정치세력의 배제)가 가장 시급하게 실천되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관에서 정상 신학교와 목사로 인정할 수 있는 최소 기준과 범위를 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불타는 가슴을 갖고 있는 목사라면 신학교와 신학생을 위해 구체적인 관심과 헌신, 기도, 실제적인 참여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목사의 도덕과 윤리 수준의 변혁이다. 고상한 선언이나 발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적이고, 실천 가능하며, 구체적인 방안이 모색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어쩌면 매우 단순하고 표피적이며 지엽적으로 보이는 방식이 차라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거창하고 원대하며 장기적인 구조나 제도, 프로젝트를 통한 개혁은 그야말로 요원하기만 하다. 교단별로 윤리위원회를 세워 목사의 도덕과 윤리 기준을 정해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소수이지만 어떻게 목사의 삶이 지금 같은 상태로 저급하게 타락했는지 가슴을 찢을 일이다. 소수라 해도 세상은 그 소수를 통해 전체를 본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목사로서 주님의 모본과 삶을 그대로 따르자. 그 핵심은 빌립보서 2장에 나타난 주님의 비움과 포기, 낮아짐이다. 철저하게 최선을 다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정당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어도 그렇다. 한 알의 밀알이 썩고 죽을 때에 비로소 그 생명은 30배와 60배, 그리고 100배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목사의 최고 모델은 섬기는 종의 모습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가셨던 주님의 죽음의 길이며, 양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는 선한 목자다. 세상의 성공과 업적, 대형교회와 유명 목사에 대한 야망, 커다란 건물과 풍부한 재정의 욕구는 우리 시대에 사단이 던지는 또 다른 광야의 유혹이다. 진정 지금 한국 교회와 목사들에게 성육신의 복음이 실천되어야 한다. 그것이 주님처럼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천박하고 세속적인 자본주의, 대형주의, 성공주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선한 목자로서의 목사 자질을 갖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