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둘째 주 목장모임

천국과 영생 / 마태복음 19:13-22

 

예수님은 남편과 아내가 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연합과 하나됨을 원하신다고 알려주십니다. 또한 어린아이를 통해 천국을 가르치시고, 재물이 많은 청년을 통해 영생을 가르치십니다.

 

말씀과 나눔

사각형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시는 예수님과의 대조는 천국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 제자들은 왜 어린아이들을 꾸짖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들은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돈벌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먹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능과 효율 면에서 어린아이들만큼 써먹을 데가 없고, 비효율적인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율법을 지킬 능력도 없고 독립적으로 살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요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존재입니다. 이런 세상의 가치기준에서 자유하지 못했던 제자들도 어린아이들을 귀찮게 여겼고, 사역의 효율을 위해서 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2) 천국은 어떤 사람의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앞의 내용은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1-12).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당시 사회의 약자는 과부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땅따먹기 전쟁에 징집된 성인 남자들은 짧게는 1, 2년 그리고 길게는 수년의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남편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자들은 졸지에 과부의 삶을 살게 되었고, 당시에는 여자들이(특히 과부들) 오늘날처럼 남자(남편) 없이도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때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부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해야만 하며, 오늘 본문도 과부처럼 사회에서 가장 약한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누군가를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은 어른처럼 자본의 욕망과 권력의 욕망에 휩싸여 상대방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거나 따르지 않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과 권력을 버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영생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며 예수님과 함께 영생의 삶을 누릴 있게 됩니다. 천국이 우리의 것이라면 어린아이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눔 1

예수님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4). 어린아이는 누군가를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천국을 소유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사각형입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계명에 대한 이야기들이오간 후,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청년은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을 쫓아 떠납니다.

 

1) 청년은 무엇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은 무엇을 통해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17)?

 

재물 많은 청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기본적으로 개념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청년은 영생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과 연결해서 영생을 소유의 개념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 것처럼,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니까(16)”라는 질문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의 주어를 보면, “내가입니다. 결정적으로 이 청년은 영생의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겁니다. 이런 질문은 결국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인데, 자기 중심적이며, 일 중심적이며, 소유 중심적인 당시의 사회가치관과 현상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17). , 생명은 소유의 개념 이전에 관계의 개념임을 알려주십니다. 마지막으로 그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는 생명(영생)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예수님은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3)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온전함의 내용은 무엇입니까(21)?

4) 청년은 왜 근심합니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이 청년은 잠시 멘붕(멘탈붕괴)에 빠졌습니다. 소유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포기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결국, 청년은 예수님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영생 그 자체를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으로 들어가는 원리를 믿지 않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청년은 예수님보다 자신의 많은 소유를 더 사랑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정한 가치와 신념에 따라서 최종적으로 해야 할 일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의 목적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키는 동시에, 생명(영생)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청년이 보여준 행동은 모든 계명을 지켰다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님을 증명해줍니다. 왜냐하면 계명들을 종합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 구제만큼 확실한 방법과 증거는 없다는 뜻입니다.

 

나눔 2

재물이 많은 청년은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16).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을 따라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21). 영생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사람의 기준과 평가에 따라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을 소유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 사는 관계로 누리고 있습니까?

 

나눔 3

청년은 예수님보다 자신의 소유를 더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정한 가치와 신념에 따라서 최종적으로 해야 할 일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17-19)의 목적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청년이 보여준 행동(22)은 모든 계명을 지켰다는(20) 말이 진실이 아님을 증명해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