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8: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은 언뜻 모순적입니다. 흔히 Paradox(역설)로 보여지는 숱한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이미 세상의 기준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첫 비유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당시 가장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에는 가장 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점령국인 로마에 부역하는 사람들이자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착복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겉모습과 일반적인 평가를 뒤집으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가 의인인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자신의 자랑이자 자부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인정 받으려는 욕구가 하나님 앞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리는 누가보더라도 죄인이었기에 하나님 앞에서도 스스로의 죄인됨을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자기의 죄를 인해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이 특별한 비유는 말 그대로 비유입니다. 모든 바리새인과 세리에게 적용 될 수 없고 같은 이유로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중심을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경건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속 사람을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겸손하게 나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구이던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는 나의 죄를 회개하고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세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어린아이들로 표현된 자세는 전적인 의존입니다. 내가 아니라 어머니의 품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그에 기대어 있는 것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닌 예수님의 보혈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