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8월 29일 미국 뉴욕 우드스톡 야외공연장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연주곡이 초연을 했습니다. 그 제목은 이후에 초연의 길이를 가지고 붙이게 된 “4분 33초”입니다. 연주자는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였습니다. 공연은 연주자가 들어와 피아노에 앉은후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를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퇴장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악보에는 “침묵”하라고 표시가 되어 있고 연주의 길이는 연주자가 마음대로 할 것을 표시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이 연주의 전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작곡자 자신은 이 곡을 쓰게 된 계기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작곡자는 여러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공간을 찾다가 하버드대학에 있는 녹음실을 찾게 됩니다. 그곳은 모든 소리를 흡수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이었고 그는 그곳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그는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녹음실 엔지니어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높은 소리는 당신의 신경체계가 작동하는 소리고, 낮은 소리는 당신의 피가 순환하고 있는 소리이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도 우리는 내 몸 안에서 움직이는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공간을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내가 소리를 내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들리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백색소음”이라는 노이즈를 들을 때에 우리가 안정을 취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생명은 반드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살아 있음으로 인해서 침묵은 어려운 과제가 되고 또 나의 침묵이 아니라 타인의 침묵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침묵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꽤나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자주 침묵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의견이나 세상의 여러 현상을 말하기 보다 조용히 침묵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침묵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침묵하심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만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과 필요를 아시고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주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 같은 때를 만나게 됩니다.
당장이라도 응답해 주실 것 같고 그렇게 하셔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도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믿음에 대한 의심과 나의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되기도 합니다. 간혹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소리질러 간청하게 되기도 하면서 아따까운 상황을 지나가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이해 할 수는 없을질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기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은 반드시 선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 비로소 하나님의 성품과 임재를 묵상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와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하나님의 성품, 그 말씀은 조금씩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분주하고 내 일이 평안할 때 고민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던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며 질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듣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