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상황을 내가 잘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와 그는 서로 다른 성장과정과 환경속에서 자랐고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마음에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보지만 그렇게 만족할 만한 반응을 얻기란 쉽지않습니다. 더욱이 내가 지나온 삶의 경험속에 일이라면 조금은 나을 테지만 그렇지 않고 나는 겪어보지 못한 것일 때에는 이해한다는 것이 말과는 다른것을 봅니다.
조금은 낮다곤해도 내가 겪어본 일들에 대하여도 우리는 섣불리 남을 이해한다고 해서는 않됩니다. 나의 경험과 그의 상황은 다를 것이고 내가 지나왔기에 그런 상황과 일에 대하여 오히려 더 쉽게 이야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공감이란 단어를 찾다가보니 여어로는 이 두단어가 자주 쓰이더군요. “sympathy, empathy” 둘다 공감이란 단어로 번역되지만 비교적 잘 알고 있는 sympathy는 동정이란 의미가 강한 단어입니다.
sympathy라는 단어는 1759년에 도덕 감정을 다룬 책을 쓴 애덤 스미스에 의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sympathy(동정)은 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가진 아픔과 약함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태도는 공감이란 것과는 조금 차이를 보입니다.
반면 empathy는 조금 더 후대에 예술가의 미학적 관점에서 쓴 독일어 ‘Einfühlung감정이입’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독일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빌헬름 딜타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이후에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공감empathy’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공감empathy’라는 단어는 동정이라는 단어에 비하여 조금 적극적으로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에 들어가서 함께 감정으로 공유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 좋은 단어이지만 나에게는 참 어려운 것이기도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되 그 사람의 처지나 형편에 들어가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선영복 선생이 쓴 글에서 처럼 “비가 올 때 내가 가진 우산을 함께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우산을 벗고 그와 함께 비를 맞는 것”은 글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계절을 지나면서 새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하신 그 크신 일과 놀라운 사랑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은 그저 그의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그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에 비추면 우리는 추하고 욕심 많은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고백되었는데 바로 그 사랑의 고백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성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인간이 가진 약함과 슬픔과 죄악됨을 겪으시고 반대와 미움을 받으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죄악을 먼저 지시고 그 결과인 죽음을 향해 기꺼이 걸어가셨다는 선언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공감, 이해라는 단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자 우리들을 향하신 마음입니다. 다시 성탄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그때만 그러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향하며 같은 마음으로 찾아오시고 말슴하시며 사랑의 고백을 하고 계신 하나님을 말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충만하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이들 중에 평화”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