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 너의 이유가 무엇이든 존중한다. 그 아슬아슬한 허기까지
김주대 시인은 낙옆이란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주 짧은 시이지만 그 안에서 마지막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매어 달린 낙옆을 햔한 시인의 마음을 봅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길을 가다보면 그 풍경에 감탄해 마지 않다가도 집 앞에 떨어진 낙옆들을 보면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보다는 긴 탄식이 흘러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나무에 달려 있는 동안에야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하는 풍경이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치워야할 쓰레기가 되는 것이 낙옆의 숙명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며 나무에 매어달려 있는 것은 아닐텐데 그 허전한 나무에 달린 몇개의 마지막 나뭇잎은 더욱 우리 가을을 쓸쓸하게합니다. 그런 나뭇잎을 보면서 그 이유에 상관없이 그 생(?)을 존중한다는 시인의 마음은 정작 우리 주변에 있는 지친 인생들을 바라보는 시선일겁니다.
지치고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느라 겨우 삶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이들이나 회사에서 삶의 자리에서 마지못해 애쓰는 것 같아 보이는 힘겨운 인생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위로할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해도 각자 자신의 삶에서 열심을 내고 지치고 힘겹지만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의 삶도 존중 받을만하고 사랑 받을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고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관계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한 교회에서 서로 알고 인사하며 지내는 관계라도 서로를 잘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한 교회로 모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형편을 다 알지는 못해도 서로 매일 친밀하게 교제하지는 못해도 관심을 기울이고 서로의 삶에 격려와 위로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서로를 위한 기도가 풍성하게 덮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알지 못해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축복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또 만날것이기에 오늘은 아껴둔 말 한마디가 오늘 그 사람에게 필요한 위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지 못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은혜를 부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위해서 기도하고 한마디 인사를 건낼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한 걸음 다가가고 그 삶에 함께 걸어가는 동역자가 되어갑니다.
오늘 만나는 만남이 앞으로도 계속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오늘 말하지 않고 오늘 기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할 수 있을 날이 많이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습니다.
오늘 잡아주지 못한 손은 앞으로 다시 잡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영원히 그에게 닫지 못할 고백이 되기도합니다. 오늘 위해 기도하지 못한 기도는 다시 올려드리지 못한 기도의 제목으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내 옆에 있는 이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