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12: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12: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2:38~44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몇가지 에피소드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본문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메시야를 향한 열망으로 모인 백성들에게 당신의 메시야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심을 선언하시며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그와 같이 왕위에 오름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을 당연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여 말씀을 묵상하게 합니다.

시편 110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은 유대인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대한 다윗의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심판하시며 구원하시는 그 날에 대해 고백하면서 '여호와(성부)'께서 내 '주(아도나이/성자)'에게 말씀하셨다고 드러내시면서 그렇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다면 오실 메시야는 다윗이 주로 고백하는 분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그와 같은 왕의 역할을 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주로 오셔서 그 권능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을 따라 이루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존경받기를 즐기는 서기관들의 위선을 경계하라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유독 서기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에 가장 교훈이 될만한 이들을 찾으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회당에서 제일 앞쪽 성경 두루마리가 있는 자리에 표시나게 앉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여 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어서 그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 다른 이들 앞에 드러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하여 애쓰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가야합니다. 우리가 나의 신앙을 교만의 이유로 삼거나 다른 이들 앞에 드러낼 조건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성전 바깥뜰에 있는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헌금하는 이들을 보시고 가르치십니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 헌금했고 게중에는 부자들은 많은 돈으로 헌금하였고 한 과부는 아주 작은 돈인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칭찬하시며 그의 헌신을 드러내어 말씀하십니다.

이 헌금함은 구제를 위해 설치된 헌금함이었고 그곳에는 자기의 소유중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 줄 것을 자유롭게 헌금하는 곳이었습니다. 부자들의 헌금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중 일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는 것이니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과부는 자기의 생활비 중 전부를 그곳에 넣으므로 스스로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형편을 아셨고 그 헌신을 아셨습니다. 아마도 여인은 자기가 그날 먹어야 할 것을 포기하고 그 돈을 헌금했을 것입니다. 나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을 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새생명의 구원을 받았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누릴 건강과 물질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또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면 좋겠습니다. 얼마를 드리며 어디까지 드리는 것이 좋으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이들을 더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선 서기관들은 자기를 높이는 일에 열심이었다면 이 여인은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돌아보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족한 중에라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중에라도 우리는 헌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중에 드리는 헌신을 기억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