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23: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23:17 (없음)
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23: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3: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3: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3: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3: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열심일 수 있을까?

그들은 왜 이토록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빌라도가 세번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천명하지만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죽이기를 외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빌라도의 목소리를 이겼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넣고야 마는 죄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든 인간들의 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미움을 받으시고 모함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 빌라도도 헤롯도 그 안에서 외치는 유대인들이나 로마의 군인들도 모두 한편이었습니다. 어느누구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이 땅의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너무도 멀고도 부담스럽습니다. 먼곳에서 바라볼 정도이기는 하지만 내게 가까이 오시고 나의 삶을 비추시면 우리는 그 빛을 거부하게 될 뿐입니다. 내 속의 죄가 드러나고 나의 악함이 보여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 욕심을 조금 숨기고 그렇게 괜찮은 사람인척 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 죄인됨을 들추어내시는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불편함이자 미움의 대상입니다.

당시의 재판정에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런 불편함은 종종 감지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은 우리의 불편을 야기합니다. 내 죄인됨을 드러내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내가 연약하고 악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낮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지만 내가 무엇인가 그럴듯한 것을 들고 나가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하나님을 묵상하고 말씀을 듣는 것도 기쁨과 감사보다는 부끄러움과 부담이 되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들고 십자가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통회하고 죄사함의 은총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해서 기뻐하며 감사한 찬양을 드리고 나의 연약을 이길 힘을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부탁하신 삶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경험하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2021년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여전히 버리지 못한 나의 자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합니다. 
.